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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맞고 돌아온 날, 부모가 꺼내는 첫 마디가 아이의 자존감을 살리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저는 아들을 키우면서 이 사실을 뒤늦게, 그리고 꽤 생생하게 실감했습니다. 온순한 아이일수록 밖에서 당하고 돌아왔을 때 이미 자신을 한없이 작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제대로 몰랐습니다.

첫 마디: 아이 마음을 가릅니다
아들은 체격이 또래에 비해 꽤 큰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격은 정반대였습니다. 누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절대 먼저 나서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저는 출장이 잦아 집을 자주 비웠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아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엄마랑 누나는 네가 지켜야 한다. 그러나 함부로 싸우면 안 된다."
초등학교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내가 속상해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아들이 가끔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맞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처음엔 "왜 가만히 있었어?"라는 말이 먼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꾹 눌렀습니다.
아이는 이미 맞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느낍니다. 여기서 부모가 "왜 때리지 그랬어?"라고 하면, 그 말은 아이에게 "너는 약하고 문제 있는 아이야"라는 신호로 작동합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수치 귀인(shame attribution)이라고 부릅니다. 수치 귀인이란, 실패나 피해 경험을 자신의 본질적인 결함으로 연결 짓는 심리 과정을 말합니다. 이 감정이 쌓이면 아이는 나중에 자발적으로 상황을 알리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해봤는데, 가장 먼저 효과를 본 말은 단순했습니다. "잘 참았다. 네가 더 대단한 거야." 이 한 마디가 아이의 표정을 바꿨습니다. 비로소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 아이가 맞고 왔을 때 첫 마디는 공감과 인정으로 시작한다
- "왜 맞았어?" "왜 때리지 않았어?"는 수치 귀인을 강화하는 표현
- "폭력으로 갚지 않은 네가 자랑스럽다"는 아이의 기질을 강점으로 재정의한다
- 첫 마디가 안전하게 느껴져야 아이가 속사정을 꺼낸다
기질: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이름 붙이는 것입니다
저는 아들의 온순함을 바꾸려고 한 적이 없었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덩치가 큰데도 먼저 공격하지 않고, 친구들과 부딪히면 오히려 먼저 양보하는 아이였습니다. 처음엔 그게 걱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기질(temperament)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기질이란 타고난 행동 성향과 정서 반응 패턴을 말하는데, 환경이나 훈육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 영역입니다. 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에 따르면, 기질은 유전적 영향이 크며 성격 형성의 토대가 되는 요소로, 억지로 교정하려 하면 오히려 정서적 혼란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못 때리는 아이를 억지로 '때리는 아이'로 만드는 일은 부모의 몫이 아닙니다. 그건 아이의 정체성을 건드리는 일입니다. 제가 경험상 느낀 건, 그 기질에 좋은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훨씬 강력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함부로 싸우지 않는 건 약한 게 아니야. 힘을 어디에 쓸지 아는 거야." 그 말을 들은 날 이후로 아들이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 보였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자기개념(self-concept)의 재구성이라고 합니다. 자기개념이란 자신에 대해 스스로 갖고 있는 인식과 평가를 말하는데, 부모의 언어가 이 자기개념의 틀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출처: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수록 아동발달 연구들도 부모의 언어적 지지가 아이의 자기효능감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일관되게 지적합니다.
내향적인 아이가 자신을 '소심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 인식이 평생의 콤플렉스가 됩니다. 반면 같은 기질을 '신중하다'고 받아들이면, 그 특성이 오히려 자산이 됩니다. 부모가 먼저 그 이름을 불러줘야 합니다.
자기보호 능력은 따로 가르쳐야 합니다
착한 마음을 인정해 주는 것과, 자기보호 능력을 키워주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인정, 그다음 가르침입니다.
반복적인 피해 상황에서 "잘 참았다"는 말만 반복하면, 아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냥 참는 것이 정답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두 가지를 명확히 구분해서 가르쳤습니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싸우는 것은 안 된다. 그러나 자신이나 소중한 사람이 부당하게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피하지 않아야 한다.
제 경험상, "맞고도 참은 것은 잘한 것"이라고만 말하면 아이가 자기보호를 스스로 포기하는 방향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단순히 "때려라"가 아니라, "어른한테 알려라", "그 자리를 피해라", "친구한테 도움을 청해라" 같은 소셜 스킬(social skill)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소셜 스킬이란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관계를 조율하는 능력으로, 이것은 기질과 달리 후천적으로 충분히 익힐 수 있는 영역입니다.
아이들은 결국 변합니다. 어릴 때 한 마디도 못 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황을 헤쳐 나가기 시작합니다. 기질 자체가 바뀌는 게 아니라, 그 기질을 다루는 소셜 스킬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그 시간을 믿고 기다리면서, 아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옆에서 계속 이름을 불러줬습니다.
지금 아들은 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그때 "왜 때리지 않았어?"라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싶습니다. 아마 아들은 오랫동안 그 말을 속에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아들이 맞고 왔을 때 진짜 첫 마디를 뭐라고 해야 하나요?
A. "폭력으로 갚지 않은 네가 자랑스럽다"는 말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는 이미 자존심이 상한 상태이기 때문에, 첫 마디가 질책이 되면 그 상처가 수치 귀인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공감과 인정을 먼저 주고, 대처 방법은 그다음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Q. 온순한 아이 기질은 나중에 바뀌지 않나요?
A. 기질 자체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다만 그 기질을 다루는 소셜 스킬은 충분히 성장합니다. 어릴 때 말 한 마디 못 하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질을 바꾸려 하기보다, 그 기질을 강점으로 이름 붙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Q. 맞고 온 아이한테 무조건 참으라고만 하면 안 되나요?
A. "참은 것이 잘한 것"이라는 말만 반복하면 아이가 자기보호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기질을 인정하는 것과 자기보호 능력을 가르치는 것은 별개입니다. 어른에게 알리기, 상황 피하기, 도움 요청하기 같은 구체적인 소셜 스킬을 함께 가르쳐야 균형이 잡힙니다.
Q. 아이가 학교에서 반복적으로 괴롭힘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반복적인 상황이라면 담임 교사나 학교 상담사에게 반드시 알려야 합니다. 아이 혼자 감당하게 두는 것은 오히려 자기효능감을 떨어뜨립니다. 부모가 먼저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도 자연스럽게 "어른한테 알리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결 론
아들을 키우면서 제가 배운 것은 하나입니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온순한 기질은 약점이 아닙니다. 그 기질에 맞는 이름을 먼저 붙여주고, 그다음에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채워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맞고 온 날, 첫 마디를 바꿔보십시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아이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천천히 지켜보십시오. 그 변화는 생각보다 빠르게 옵니다.